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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현이가 내게 니 머리모양이 오늘 삼각적이라고 말했을때, 그 말은 하나의 운율이 되었고,
그 운율은 사랑은 삼각적이야,라는 노랫말로 치환되어서
하루종일 머릿속을 울리더니,
결국 h군을 만나서 너의 사랑은 삼각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삼각적이어야한다라는 도그마로까지 이어졌다.
한 단어가 분산적이고, 모호한 의미에서 결국 어떤 행동강령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나의 상태를 보여주기에 너무나 적합한 것이다.
갈망하는 것이 있는데, 의미망을 점점 넓혀나가면서 그것을 결국 행동에까지 이어지게 한다!라는 것.
이 단순한 삶의 질서와 법칙을 나이브한 태도와 감상적 자세로 허비해오고 있다라는 자각.
이틀째 눈내리는, 서울.
어김없이 멍한 머리 끌고 사무실에 나와서 앉아있다.
어떤 순간은 내가 쏟아놓는 현재 감정상태에만 침잠하다가
어떤 순간은 그것을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서 아주 회의적인 결론에 도달하는데
아침에 지하철안과, 해도 뜨지 않은 시각에 벌써 일을 시작하고 있는 사람들과
사무실 앞 건설현장, 벌써 오층까지나 올라선 콘크리트 위에서 눈발 아래 서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결국 사는 것은 이러한 것이라고 또 섣부르게 한발 내딛으면서 갑갑해할때
영화현장이 생각났고,
나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조차 않고 있고, 일한다는 것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공부를 하고, 끈질기게 파고들고, 사람들을 만나고, 여행을 떠나고, 영화를 만들고하는
일련의 것들은 삶이 본질적으로 불안하고 지루해서인 것이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레이몬드 카버의 글이 그만큼 엄청나다고는 할수 없지만,
그래도 그 순간 순간이 삶의 본질이라고 느끼게 하는 힘이 있는데,
결국 내가 이렇게 생각이 끊어질까 두려워서 급히 포스팅을 하고 있는 이순간이나
직선적으로 쏟아지는 눈발을 헤치면서 바흐를 듣는 순간들이나
어쩔줄 몰라 사람들을 만나다가, 그러면서도 알수없는 회의감으로 몰아치다가
그러다가 피곤해져서 혼자 있을때, 그것도 행복하고 충만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과
어쨋든 어느날은 충만한 감정으로 행했던 것들이, 그속에 이미 회의적인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것.
그 모든 것들이 삶의 요소들인것이다.
어떻게하면, 회의적인 느낌을 거세해버리고, 창조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데 치중할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삶의 관건-결론은 움직이고, 깨지고 또 회의하고, 또다시 움직여야한다는 것인데,
이것도 습관의 면이 있어서 계속 하다보면 자동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게 될것이라는것.
이것은 나의 생활태도와도 비슷한데, 이렇게 어렵게 보이는 행동!의 영역이 사실은
한두번하다보면, 마치 처음에 어려웠던 양말사기와 비슷한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때의 유의점은 결국 양말사기의 편리성을 위해서 한 거주지에만 머무를수 없으며,
어떤때는 구멍난 양말을 깁기도 해야한다는 것.
그렇게 같은 패턴으로만 고민을 계속하게 될 때는 또 한때 충만했던 것이
다시 아래로아래로 내려앉아 아주 짜증나는 상황에,
무감각하고 무의미해서 숨막히는 상황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변주가 항상 필요하다.
어쨋든, 지금은 양말사기 일단계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두눈 부릅뜨고 스타트의 정신을 가져야한다.
그래야 에너지도 송송 계속 생겨나고, 그리고, 성격도 저급해지지 않으며,
상황에 밀려 그저 부유하지 않게 된다.
그래도, 결국 이런 생각이 하루반만에 엎어진다고해도
이런 쓸데없어보이지만, 또한 어쩔수 없는 행동들은,
한순간 충만했다가 사라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기에는 너무도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이 반복속에서 조금씩 변화하는 결과를 내면서
삼각적인 것을 구현해낼수 있다는 것.